엄마라는 이름의 감정 노동자
엄마의 초상화/유지연 글, 그림.-이야기꽃(2014).
ISBN(13):9788998751098
그림책
영유아부터 성인까지.
이수경(평택시립장당도서관)
‘엄마’에게서 ‘인간 여자’의 모습을 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수년 전 문득 깨어보니 초저녁 잠이 많은 엄마가 말짱히 깨어있으셨습니다. 엄마는 옷장을 몽땅 털어 ‘프리티 우먼 옷갈아입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안을 런웨이 삼아 걷기도 하고 턴도 하시고 앞태도 보고 뒤태도 보시는 겁니다.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 놀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부지런하기 이루 말할 수 없고 마을 사람들과 그 흔한 싸움 한번 없고 맏며느리로 큰 웃음 웃는 ‘손 큰’ 우리 엄마는 무엇을 좋아할까, 또는 무엇을 싫어할까? 오남매를 키우면서 싫어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뱉은 적이 있으셨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사람인 이상 욕망이나 희망이 없진 않을터이니 엄마는 생이 주는 대로 받느라 한 세월 다 보내셨나 봅니다.
유지연의 그림책을 보며 엄마를 떠올리니 짠한 마음이 듭니다. ‘엄마’와 ‘미영씨’. 지킬과 하이드처럼 ‘엄마’와 ‘미영씨’는 한 존재의 두 얼굴입니다. 엄마인 듯 엄마 아닌 엄마 같은 미영씨?! 대중가요 가사를 인용했지만 우리네 엄마들은 자신과 ‘썸’ 탈만한 정신적, 육체적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지겹게 반복되는 가사노동으로 가족들을 거둬먹이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른 가족들의 ‘짜증받이’가 됩니다. 가족의 몸 건강과 정신 건강을 책임지는 감정 노동자 역할입니다. 거기에 어쩌면 모자라는 생활비를 알음알음 벌어오는 역할이 더해지기도 하겠지요. 지은이는 엄마의 두 마음을 딸의 시선으로 그립니다. 딸이 엄마가 되면 그 마음 헤아릴까요? 딸이 살아온 시절과 엄마가 살아온 시절이 다르니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어쩌면 엄마 또한 자신을 잊고 살아왔을 겁니다. ‘엄마’는 딸이 그린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그대로 내려앉은 자신의 모습, 당신이 품고 있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조용한 거부반응이겠지요. 엄마는 여행을 떠나고 그 곳에서 ‘스스로’ 갖고 온 그림을 딸이 그린 자신의 초성화와 나란히 놓아둡니다. 알록달록 오롯이 그 모습으로만 살 수 없지만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자신입니다.
글밥이 많지 않은 그림책으로 엄마의 두 존재는 색상과 크기로 강한 대비를 줍니다. 현실의 엄마는 무채색, 여자인 엄마는 화려하게. 그림의 크기도 다릅니다. 현실의 엄마그림은 대부분 한 장의 반쪽을 넘지 않습니다. 욕망에 충실한 엄마는 한 장을 가득 채웁니다. 현실의 엄마가 여행을 꿈꾸자 엄마의 일상은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하고 - 장면 크기도 조금씩 커집니다 - 마침내 엄마와 미영씨는 그림책 양면을 활짝 열어 화려한 빛깔로 태어납니다. 무채색과 화려한 빛깔로 구분되던 엄마는 미영씨와 합체하니 무채색 현실에 고운 빛깔 꽃무늬가 들어옵니다. 무채색 엄마는 고운 빛깔 미영씨를 가끔 불러내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겠지요. 늘 그렇듯 엄마는 자식들이 부르면 달려갈 채비를 하고 있겠지만, 좋고 싫고가 있는 ‘미영씨’일때도 있습니다. 엄마의 낯선 모습에 박수 쳐줄 준비 되셨나요?
어른을 위한 그림책으로 자신의 숨은 모습을 발견하고 싶은 분들과 장성한 아들, 딸들에게 추천하고 싶고, 아이들과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우리 엄마’와 함께 보며 ‘엄마’ 또는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은 책입니다. 6,7세 어린이들에게는 무언가를 꿈꾸는 엄마를 그린 그림책으로 읽어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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