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간없이 깊은 삶의 더께 너머
변두리/유은실 지음. - 문학동네(2014).ISBN(13) : 9788954626521
동화책(청소년소설)
초등고학년/ 청소년
이수경(평택시립장당도서관)
우리는 언제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가? 살다보면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과 누군가에게 당하는 ‘모욕감’이 분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받아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 길에서 꼭 학교 친구를 만난다. 여자애들과는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데 남자애들과 만나면 막걸리, 양은주전자, 걸을 때마다 주전자에서 새어나오는 막걸리, 양은 주전자를 든 내 모습이 조각조각 분리되어 땅으로 꺼지든가 아니면 하늘로 솟구치고만 싶었다. 남자아이들이 나와 양은 주전자를 보며 실실 웃었을 뿐인데 부끄러움과 모욕감 사이에서 내 마음은 갈팡질팡하였다. 그 어린 나이에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 새어 나오는 막걸리에서 삶의 누추함과 누추함의 현신 그 자체인 나를 느꼈나보다. 바야흐로 자의식이 뭉게구름처럼 커지는 나이였을게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를 부끄러워하며 ‘비교지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는 곧 벌어질 막걸리판의 전조이다. 기분좋게 시작된 막걸리판은 곧잘 고함과 욕설이 오갔고 마지막은 또 언제그랬냐는 듯 훈훈하였다. 그 시절 우리 마을의 삶은 누구든 별다르지 않았으나 뭉게구름 자의식덩어리 ‘나’는 그 세계와 ‘불화’하였다. 아이는 자라 마을을 떠났고 그 길에 살며 존재를 부끄러워하던 시절은 어느덧 잊혀졌다. 잊었다 생각한 그 느낌, 그 마음, 그 불화를 알알이 소환한 책이 나왔다.
「마지막 이벤트」의 저자 유은실의 첫 청소년 소설 「변두리」. ‘내 삶의 중심, 변두리에게’로 책은 시작된다. 우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변함없이 미래에도 변두리, 경계에 선 삶을 살 것이다. 몸도, 마음도. 서울 변두리의 신산하고 누추한, 그래도 꿈과 기대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던 시절, 부끄러움과 모욕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수원’이 주인공이다. 갈팡질팡 ‘수원’의 바램은 소박하다. 술만 마시면 남의 빨랫감을 고이 집어오시는 아버지가 변태 이미지를 벗는 것, 방문을 열면 도로가 훤히 보이는 집에서 이사하는 것, 부끄럽기 짝이 없는 선지 들통을 무겁지 않냐고 물어봐 주는 정구오빠에게도 근사한 별명을 하나 지어주는 것. 그 소박한 소망은 이뤄보지도 못한 채 밉상 영미 앞에서 동생 때문에 선지 피바다속을 헤엄쳤다. 그 순간 느낀 부끄러움과 모욕감을 동생에게 화풀이하였다. 수원은 술만 마시면 욕설을 날리는 지긋지긋한 아빠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았다. 거짓말, 허세, 빈곤, 결코 면역되지 않는 모욕감과 저절로 운동이 되는 마을 뒷산, 초경과 몽정을 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한 아까시 나무 눈꽃날. 수원과 그 이웃들은 꿈꾸는 중산층의 삶에 다다르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곧잘 악다구니로 머리채를 잡고 드잡이를 하지만 ‘그래봤자 이웃, 그래도 이웃인가’. 한푼이라도 벌어보려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는 이웃 아주머니를 위해 수원은 수레를 밀고, 수원의 엄마는 정구 오빠네를 위해 상숙이네에 부탁을 하러간다.
삶의 한없는 하찮음을 견디는 힘은 서로를 위해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있을 때 생겨난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벌하는 ‘비교 지옥’의 삶은 누추한 서로의 일상을 ‘받아들일 때’ 탈출할 수 있고 그렇게 “변두리는 우리 삶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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