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서평대상 서지사항
아몬드 : 일반 / 손원평 글. - 창비, 2017
263p. ; 19cm.
9788936434267 : 12,000
o 분야
일반도서 (800)
o 추천대상
청소년 및 성인
o 상황별추천
혼자가 편한 사람들을 위한 책
이병희 (안성시 보개도서관)
너 지금 나를 바라보는 거니? 할 말이 있는 거니?
언제인가, 표지의 디자인이 책의 완성도에도 일정부분 기여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또 2016년 ‘올해의 출판인상 디자인부분’의 수상자 ‘석윤이(미메시스 디자인)씨’가 “책이 예쁘면 읽고 싶고,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인터뷰한 것을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내용이 좋으면 책은 알아서 독자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손원평의 장편 소설 ‘아몬드’를 만나고 나서는 저의 그런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표지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적어도 표지 자체만으로도 전해지는 표정과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창비에서 펴낸 ‘아몬드’의 표지에는 한 아이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주인공의 모습이겠지요? 반쯤 감긴 눈, 굳게 다문 입술, 단정한 머리스타일,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얼굴형. 아이의 모습은 아주 평범합니다. 하지만 그 평범한 모습 속에서 저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뜨고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한 두 눈에서. 앙다문 것도 아닌데 웬만해선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은 입술에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더군요.
‘이봐, 넌 지금 누구를, 아니 무엇을 보고 있기에 그렇게 표정이 없는 거니? 나를 보고 있니? 아니 무언가를 보고 있기는 한 거니? 화가 나 입을 다물고 있는 거니? 그냥 할 말이 없는 거니? 말해 줄 생각조차 없니? 너무 답답하고 궁금하구나. 좋아! 그럼 내가 다가갈게. 이제부터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강렬한 첫 장면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편함
이야기는 시작부터 아주 강렬해서, 보는 이이 몰입감을 급속도로 높여줍니다. 한 아이가 길을 잃었습니다. 아이의 나이는 여섯 살. 낯 선 곳에 홀로 남겨진 여섯 살 아이. 무섭고 혼란스러울 법도 하지만 아이는 그저 걷습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우연히 어느 중학생이 집단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중학생은 많이 다쳤는지 움직이지도 못하죠.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한 아이는 근처 구멍가게로 들어가 도움을 청합니다.
“아저씨. 골목에 누가 쓰러져 있어요.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심각한 내용을 전달하는 아이의 말투와 태도는 너무나 평온합니다. 전혀 서두르는 기색도 없고, 목소리에서도 놀람이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6살 아이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서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요? 아이의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한 가게 주인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저씨를 설득할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저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죽을지도 몰라요..” 뒤늦게 경찰을 불러 현장을 찾았을 때 중학생 아이의 목숨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놀랍게도 죽은 아이는 가게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슬픔에 몸부림치는 주인 아저씨는 아이에게 삿대질 하며 외칩니다.
“네가 조금만 진지하게 말했더라면 늦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아이는 아저씨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했기 때문이죠.
『옆에서 경찰이 유치원생이 뭘 알겠느냐며 고꾸라지려는 아저씨를 간신히 받아 세웠다. 나는 아저씨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나는 줄곧 진지했다. 단 한 번을 웃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질책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섯 살의 짧은 어휘로는 그런 의문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잠자코 있었다(본문 19p)』
어떤가요? 이야기의 첫 장면만 보아도 우리는 이 아이가 심상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 무엇이 이상한 걸까요? 아이는 위기 상황을 보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달려가서 위급함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지요. 누구나 할 만한 행동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니 이상한 점은 바로 아이의 행위가 아니라 태도였습니다. 보통의 6살 아이라면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두려움에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중학생의 아버지도 단박에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챘겠죠. 하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른들보다 침착하고 냉정했습니다. 마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혼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의 이야기
앞서 말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바로 여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일까요? 바로 아이의 태도입니다.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기준에서 벗어났다. 나아가 나와 다르다는 느낌은 대개 우리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고, 아이의 태도는 이런 요소를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이의 이런 태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아이는 알렉시티미아, 즉 감정 표현 불능증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작은 뇌의 편도체 때문에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아이. 그 아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 ‘윤재’입니다.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삶이 어떨까요? 아무래도 불편한 부분이 없을 수 없겠지요. 아니 어쩌면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가 결여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면, 집에 불이 나도 왜 빠져나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와도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건 타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입니다. 공감의 부재죠. 공감을 못한다는 것은 곧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야기 속 윤재 역시 그런 문제로 고통을 느낍니다. 아니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니죠. 윤재는 감정이 없으니까요. 고통을 느끼는 건 윤재의 가족입니다. 특히 윤재의 엄마는 이대로 가면 윤재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지를 알기에, 아이를 고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윤재의 할머니 역시 그런 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줍니다. 비록 증상에 차도는 없었지만, 두 분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에 윤재는 큰 문제없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아니 윤재는 외로움도 느낄 수 없는 아이이니 문제가 아닌 건가요? 이럴 때는 감정을 못 느끼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어찌됐든 윤재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항상 혼자인 삶을 이어갑니다. 그러다가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윤재를 진정한 혼자인 삶으로 밀어넣은 비극이.
진정 조화로운 삶이란?
윤재에게 일어난 비극은 바로 ‘묻지마 살인’ 이었습니다. 윤재의 생일날, 그 일은 일어났죠. 세상에 대한 분노로 똘똘뭉친 어느 남자가 이유없이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를 흉기로 공격했습니다. 엄마는 크게 다쳤고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윤재는 공포도, 연민도, 분노도 느낄 수 없었기에 그저 그 상황을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윤재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끈과 같은 두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완벽하게 세계와 단절이 된 것이죠.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 사건 이후에야 윤재가 조금씩 세상과 소통을 하게 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바닥을 한 번 쳐봐야 일어날 용기를 얻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윤재에게 두명의 친구(?)가 생깁니다. 이수와 도라. 그들은 각자만의 방법으로 윤재의 삶에 개입을 하고, 조금씩 윤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렇게 윤재는 혼자만의 틀 속에서 벗어나 세상과 살을 맞대기 시작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에는 혼자만의 삶에서 벗어나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해 나가는 윤재를 보며 흐뭇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윤재가 끝내 그 만의 고치 속에 묻혀 살았다고 해서 문제될 게 있었을까? 윤재는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할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사람이 고통에 빠졌을 때는 도와야 한다는 것도 잘 아는 아이었습니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지만, 뒤집으면 불행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윤재를 굳이 세상 속으로 끄집어 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저대로 사는 것이, 사람과 억지로 교류하기 위해 온 갖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 낫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아마도 정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에 따라 ‘윤재의 부화(孵化)’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겠지요. 그렇기에 저 역시 굳어 여기에서 저의 생각을 밝히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만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소개하면서 끝내겠습니다.
君子和而不同(군자화이부동) 小人同而不和(소인동이불화)
: 군자는 모든 사람과 조화를 이루나 같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허나 소인은 같음만을 원하고 조화를 이룰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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