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미있는 도서관

한국의 도서관 역사 - 고조선과 한사군 시대


한국의 도서관 역사 - 고조선과 한사군 시대

한국에서 근대적인 도서관의 출현은 서구문명이 물밀듯이 밀려들던 19세기 중엽입니다. 이 당시 새로 창설 된 초기의 도서관은 규모도 작았거니와 일정한 명칭이 없이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적당한 명칭을 붙였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서적관(書籍館), 서적원(書籍院), 집서원(集書院), 장서관(藏書館), 서적고(書籍庫), 서고(書庫), 문고(文庫), 서관(書觀), 서적종람소(書籍從覽所) 등등 입니다.

한국에서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광무 10년(1906)입니다. 1906년 2월 초, 한국도서관의 필요성을 통감한 이범구, 이근상, 박종화, 윤치호 등 도서관 설립에 뜻을 모은 이들이 그 설립을 발기하고 한국도서관 창설을 위한 평의회를 구성하였었습니다. 같은 해 2월 12일자 황성신문은「韓國圖書館」이라는 제목으로 그 설립 경위를 자세히 보도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찾아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사용 된 근대적인 한국의 도서관 역사는 짧지만,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의 본 기능으로 본다면 한국의 도서관 역사도 깊다고 볼 수 있죠. 앞으로 도서관의 본기능으로 바라 본 한국의 도서관에 대해 시대별로 소개해 나가겠습니다. 오늘 소개 할 시대는 고조선과 한사군 시대입니다.

고조선과 한사군 시대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되어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기원전 108년에 한의 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인 한사군이 설치될 때까지 한반도 서북 해안 지역에 있던 부족 국가인 단군 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 한다. 이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의 사기 등에 전해지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증명할 근거는 없다.

한사군은 중국의 이민이나 유민이 유입되면서 중국의 선진 문화가 전래되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 전래 정도는 알 수가 없다. 서적 및 문고와 깊은 관계가 있는 (1)봉니 ,인장, 와전 등의 유물이 대동강 유역 토성리 낙랑 유적지에서 발견되면서 한사군 시대에 문고가 존재했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2)목간을 문서 재료로 사용하던 당시 아교질 진흙 덩어리인 봉니 수효가 1936년까지 188개에 달하고 있는데 이는 많은 수효의 문서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 외에도 낙랑의 채협총에서 발굴된 출토품 중에 권자본의 질통이라고 짐작되는 채문 칠권통과 연상, 벼루 등이 부납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평양에 있는 한대의 고분에서 종이의 재료로 추측되는 섬유질 물건이 나왔다는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한사군 시대에 이미 우리 나라에 책이나 문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문서나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를 보관하고 사용하는 문고, 즉 도서관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1) 봉니
기물(器物)이나 문서를 봉하기 위하여 사용한 작은 점토 덩어리.종이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죽간이나 목간에 봉니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고안되었다. 봉니의 명(銘)에는 소유주나 문서의 발신인명, 관직, 지명 등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출토된 유지의 역사적 성격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목간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하였다. 나무를 폭 약 3 cm, 길이 약 20∼50 cm, 두께 3 mm 정도의 긴 판자모양으로 잘라 거기에 묵서(墨書)하였다.


재미있는 도서관 경기도사이버도서관 www.Libr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