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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들의 책 이야기

또~~야?

 

정은영

(경기도사이버도서관 사서)

 

“또야, 가서 콩나물 사 온”

“은영아, 슈퍼 갔다 올래?” “은영아, 물 떠올래?” “은영아, 쓰레기 좀 버리고 오렴”

“또~ 야?”

“왜 나만 시켜~”

 

어렸을 적 심부름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네 명의 형제 중 셋째였던 저에게 심부름은 필요충분조건(?)이었던 거죠. 엄마가 언니에게 시킨 심부름을 언니가 오빠에게 시키면 오빠가 저에게 시키고, 저는 동생에게 시켜보지만 옆에서 보고 계시던 엄마가 한 말씀 하십니다. “어린애가 어떻게 하니~ 은영아 니가 하렴.” 아~ 심부름은 온통 제 차지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또야”라는 이름을 보고서는 “또! 야?” “왜 나만~”이라고 반문하던 제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또야 너구리도 저 같을 줄 알았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가슴 졸이면서 나와 같은 모습이 언제 나올까 했지만, 아쿠야! 권정생 선생님의 또야는 심통꾸러기 은영이가 아니라 “착하구나.”라는 말을 들을 만한 어여쁜 너구리입니다. “돈 백 원이 심부름 값이라면 아무래도 찜찜하잖아요. 엄마가 시키는 일에 어떻게 값을 받겠어요.”라고 생각하는 마음 따뜻한 아이인거죠. 콩나물을 사러가는 또야 너구리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또야가 자랑할 때나 즐거워 할 때마다 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그런 또야의 마음을 모르는 어른들은 ‘무덤덤’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기운바지가 너무 입기 싫었지만 산에 꽃들도 예쁘게 피고, 하늘에 별들도 더 반짝이게 된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기운바지를 선뜻 입는 너무 이뿐 아이입니다.

 

너구리 엄마는 더 멋집니다. 산벚나무꽃도 피라미, 나부래기랑 별님도 모두 모두가 예뻐지게 만드는 기운 바지의 비밀을 또야에게 가르쳐주거든요. 또한, 또야의 마음을 너무 잘~알아서 심부름 값도 주지 않습니다. “아니, 심부름은 그냥 하는 거고 백 원은 그냥 주는 거야.” ‘그냥’이라는 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이라는 말에서 엄마 너구리가 우리 또야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냥’이라는 말 한 마디의 배려를 통해 또야가 얼마나 즐거워지는지를 보게 됩니다.

 

 한번 상상해 봤습니다. 내가 또야네 너구리 마을로 간다면 어떤 어른이 될까? 너구리할머니 같을까? 너구리엄마 같을까? 너구리선생님 같을까? 또야 너구리에게 어떤 부분을 가르치려 했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쳤을까요?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길을 가르치려 했을까요?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또야 너구리로 키울지 「금복이네 자두나무」의 최주사로 키울 것인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최주사 같은 사람만이 우리네 이웃으로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그러나 금복이네 이웃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신작로가 될 땅 뙤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속여 팔아버리는 최주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두나무를 선물로 주고 함께 심고, 자두가 열리기를 같은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린 성철이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금복이네 자두나무」가 현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같은 일이라 해도 적당히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있는 것까지도 빼앗겨야 하는 현실이라는 거죠. 참으로 마음 아픈 현실을 담고 있는 동화책인데도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책에는 늘 따뜻함이 묻어있습니다. 슬프디 슬픈 이야기이지만 결코 슬프지만은 않은 따뜻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 속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때문입니다. 『몽실언니』에도, 짧은 글인 「금복이네 자두나무」에도, 익살스러운 『밥데기 죽데기』에도…….

 

지금 우리네들의 퍽퍽함은 너무 풍족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밤톨 다섯 개 정도 들고나가봤자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친구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지금의 아이들이 어쩌다 하나 생긴 ‘아이스께기’ 하나 달랑 들고 서 있는 친구에게 “한입만~”이라고 조를 일이 있을까요? 무릎과 팔꿈치가 뚫어져서 덧 데야 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배고픔이나 부족함을 이해할 일도 없습니다. 매 끼니를 못 먹는 친구에게 “밥 없으면 빵 먹으면 되지”라고 서슴없이 이야기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능력들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세대에, 너무도 부유하고, 풍요롭고, 발전해 가는 이 세대에 권정생 선생님의 가난하고, 부족하고, 어딘가 촌스러운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풍요롭지만 퍽퍽한 세대에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들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사는 이 세상에는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기운 바지를 입어야 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옆에 우리가 보지 못한 바로 옆 골목에 분명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다 조금 앞 세대에는 내가 배고파 봤고, 내가 부러워 해봤기 때문에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세대는 배고팠던 경험도, 기운 바지 때문에 창피했던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무엇으로 이웃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따뜻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말랑 말랑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또야들을 학원으로, 학원으로, 또 학원으로 몰아내는 우리네 엄마들에게 이런 비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또야같으면 좋겠습니다. 코야, 후야, 차야, 찌야, 뽀야 친구들에게 다섯 개의 밤을 다 나눠주고 난 다음에서야 자기 몫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또야처럼 말입니다. 돌배나무 아래서 ‘돈, 돈, 돈’ 을 이야기 하고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어딘지 따뜻함이 없잖아요? 마음껏 뛰어놀고 싶고, 동무들과 사이좋게 이야기 나누고, 만화영화도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 때문에 동화를 쓰는 것이 미안하다는 권 선생님.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책을 조금씩, 꼭 읽고 싶을 때만 읽으라고 말씀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지금 우리네 엄마들은 알고 계실까요?

 

‘무덤덤’한 우리네 엄마, 아빠가 각박한 삶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직은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이 더 좋은 우리 아이들이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권정생 선생님의 지혜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권 선생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옆에 있는 또야 너구리가, 용구삼촌이, 몽실언니가, 또 강아지 똥이 들려줄 겁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는 곳인지, 그러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그 따뜻한 마음이 그리워서 권정생 선생님의 책 한권을 꺼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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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위해 다시 읽은 책

『또야 너구리가 기운바지를 입었어요』, 권정생 동화집, 박경진 그림, 우리교육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권정생 외 지음, 원종찬, 김경연 엮음, 창작과비평사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밤 다섯 개」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권정생, 손춘익, 이영호, 이현주, 정휘창 지음, 윤정주 그림, 창비

     -「무명 저고리와 엄마」

     -「강아지똥」,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금복이네 자두나무」

『밥데기 죽데기』. 권정생 지음, 바오로딸

   


* 이 글은 2010년에 발간 한
<권정생 선생님 3주기 추모문집> 『권정생 선생님 책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