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
【날 좀 내버려둬 / 양인자 외 / 푸른 책들】
‘ 이 달리기가 끝나면 난 또 어두운 방에서 늦게 돌아오는 아빠를 혼자 기다려야 한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손가락질 하겠지. 그래도 좋다. 모든 게 휙휙 지나가는 지금 이 순간,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리고 싶다. 나를 보며 수군 거렸던 저 사람들, 비웃었던 아이들, 모두 날 잊게 만들고 싶다.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간다. 중심을 잃고 쓰러질까 봐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는 아이들, 함성, 운동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는 것 같다. 만국기도 바람에 날리고 있다. 날 좀 그냥 내버려두라고, 일제히 소리치는 것 같다.
단편 동화집 『 날 좀 내버려 둬』의 표제작 「 날 좀 내버려 둬」 의 한 장면이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빠와 단둘이 사는 채민이가 견뎌내야 하는 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만이 아니다. 덤으로 얹어지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어린 채민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아프다. 세상에 대한 반항과 원망을 키워가며 스스로를 소외시켜 가고 있는 채민이가 세상을 향해 ‘날 좀 내버려 둬’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속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듬어 달라는 비명인 지도 모른다. 무심한 듯 하지만 속 깊게 배려할 줄 아는 선생님이 있었기에 채민이는 완전히 마음을 닫는 대신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달려보기로 한다. 물론 신나는 달리기 한판으로 현실이 호락호락하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 쯤은 아이들도 잘 안다. 달리기를 방해하는 목걸이야 던져 버리면 그만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리 쉽게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미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알지만 고맙게도 다시 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이들 특유의 회복 탄력성이자 강한 생명력 덕분이다. 주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 지 돌아보게 하는 수작 (秀作) 이다.
이 책은 < 제 7회 푸른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표제작 외에도 자신 때문에 애완견이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말문을 닫아버린 재원이와 동식이의 이야기를 그린 「벌레」, 치매 걸린 할머니를 둘러싼 가족 해프닝을 유쾌하게 그려낸 - 노인문제를 다루었지만 기존 작품들과 색깔이 다소 다른 -「 지폐 수의를 입다」, 그간 동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골프를 소재로 가져온 「다미의 굿 샷」, 아이의 눈높이에서 접근하였으나 이웃과 나눔에 대한 성숙한 시선을 보여주는 「동생 만들기 대작전」, 몽골에서 온 새엄마와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초원을 찾아서」, 공부만을 강요하는 엄마로 인해 피폐해진 아이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푸른 목각 인형」, 외로움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그린「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등 수록된 8편 모두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세련된 상징과 은유, 치밀한 심리묘사, 군더더기 없는 반전 등 단편의 장점을 잘 살려낸 작가들의 필력이 돋보인다. 어른이 읽어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들이지만 정작 아이들이 상징과 행간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까 우려의 마음이 드는 것은 역시 부족한 어른의 편견탓이라 믿어 본다.
(평택시립도서관 유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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